세상사는 이야기/여행스케치

선배와 함께 찾은 충주 수안보호텔 주변 문화유적지 탐방

불~나비 2018. 11. 18. 11:14

이번 여행은 옛 직장동료들과 함께 출발하는 여행이다. 차량 2대로 8명이 2018년 11월 16일(금), 19시에 공릉동을 출발하여 충주 수안보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2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우리는 호텔에 체크인 후, 숙소에 들어와 오랜 시간을 이런, 저런 이야기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내다가 잠든다. 그다음 날(2018년 11월 17일)은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충주 일대 문화유적지 탐방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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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로운 천년미소 미륵마을, 충주 미륵대원지 입구이다. 미륵대원지는 충주 수안보호텔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인근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역사 탐방에 나선다.

  

 

하늘재 가는길이다. 2.0km를 가면 하늘재를 만날 수 있다. 하늘재는 우리나라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하늘재 역사, 자연관찰로는 포근한 숲을 거닐며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직접 느끼고 자연과 역사와의 만남 속에서 선조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하늘재길을 따라 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미륵대원지이다. 이 곳은 미륵대원지의 대웅전이다.

  

 

[충주 미륵리 원터는 충주 미륵대원지(사적 317호) 창건과 더불어 지리적 중요성이 큰 이 곳에 원(院)을  세우고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원터는 고려 초기 충주와 문경을 잇는 계림령(지금의 하늘재)으로 위치하여 충주를 넘어가면 문경 관음리에 절터가 있는데, 이 또한 원의 기능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조령이 개통되면서 미륵리의 원은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해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에 대한 조사 결과 두 차례 중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으며 건물의 형태는"回"자 구조로 가운데에 말을 묶어두는 마방을 두고 주변에 여행자와 관리인이 기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이며 남북을 잇는 요충지인 계림령로에 자리했던 이 원터는 미륵대원지와 더불어 사원과 역원의 기능을 두루 갖춘 중요한 유적지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륵대원지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당간지주이다.   [당간지주는 깃대를 매다는 장대를 고정하기 위한 장치로 보통 사찰의 입구에 세워 신성한 지역임을 나타낸다. 현재 지주와 간대로 보이는 석재가 남아 있는데 간대 및 윗면에는 2중의 원각선을 양각하였다. 지주는 아랫부분이 결실되어 전체 크기를 알 수 없으나 윗부분 바깥면에 6 엽 연화문을 양각한 것은 희귀한 예이다. 통일신라시대보다 상대적으로 폭이 넓고 높이가 낮은 고려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륵대원지 사각석등이다.  [이 석등은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특이한 결구 수법을 보여주는 석등으로 특히 석주형 화사석은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부 석등에서만 채용된 기법으로 고려 수도인 개성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다.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지역에 4 각석 등이 세워졌다는 것은 석등 양식이 지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고려시대 절터에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 석등과 고려시대의 사각 석등이 함께 세워져 있음은 통일신라문화와 고려문화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이다. [높이 6m의 오층 석탑으로 그 자리에 있던 바위로 받침돌과 기단을 만든 후 초층탑신석을 올려놓았다. 바위 안쪽을 파내어 만든 기단 면석 한 면이 직각을 이루지 못하고 일그러져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일반적인 탑의 모습과 비교할 때, 옥개석의 너비가 탑신석에 비해 아주 좁고 낙수면의 기울기가 심하며 각층의 체감률도 고르지 못해 투박하고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륵대원지 원터는 보수공사중에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불상의 모습만 볼 수 있었다.

  

 

공사중인 원터에서 바라다 보이는 석조 등과 오층 석탑의 모습이다.

  

 

보수공사가 끝나면 이런 모습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충주 미륵대원지 석조 귀부이다. [사찰의 남북 종축선에서 약간 좌측에 위치하여 북향하고 있으며 길이 605cm, 높이 180cm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거북 모양 받침이다. 귀갑문은 생략하였으며, 좌측 어깨 부분에 작은 거북 두 마리가 기어 올라가는 형태를 양각하였고, 앞쪽의 발은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나 형식화되었다. 귀부의 등 가운데에 비 좌가 있으나 비를 세울 수 있는 정도는 아니며 수차례 발굴조사에서 비석 조각조차 찾지 못했음을 볼 때 원래 비는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 함께 문화유적지 탐방에 나선 옛 직장동료들이다.

 

  

탐방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잊혀가는 고개들에 대한 표지가 보였다. 계림령에서 하늘재까지 기록이 적혀 있었다.

  

 

그다음 탐방코스는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 석탑을 만나러 간다.

  


보물 제94호 빈 신사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 탑으로 상층 기단부에 사자 4마리를 배치하여 탑신을 받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하층 기단 정면에 적힌 이탑의 내력을 통해 원래 9층 탑이었고, 탑이 만들어진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어, 다른 석탑의 조성연대를 추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단 기단 정면에 적힌 명문은 모두 10행 79자의 해서이며, 고려 현종 13년(1022년)에 "몹쓸 적들이 아주 물러갈 것"을 기원하면서 월악산 사자 빈 신사에 구층 석탑을 세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종 당시 거란족이 빈번하게 고려를 침입하였기에 이탑은 불력으로 거란족의 침탈을 막아 태평 안민을 기원하고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네모 서리에 한 마리씩 배치한 사자는 사방을 경계하듯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4마리의 사자상 한가운데에 비로자나불상을 모셔 두었다. 앉은 모습의 비로자나불상은 특이하게도 두건을 쓰고 있으며 뒷 머리에 나비매듭과 앞 얼굴의 표정이 매우 흥미롭다.

 

  

사자 4마리와 비로자나불상 앞모습이다.

  


상층기단의 중석은 가장 특색 있는 부분으로 내 귀에 형상이 각기 다른 4마리의 사자를 앉혀 갑석을 받치고, 중심에는 비로자나불상을 안치한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다.

  

 

그다음 여행지는 충주 탑평리에 위치한 중심 탑이다.

 

  

역사해설가한테서 중심 탑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국보. [ 제6호인 충주 탑평리 7층 석탑은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중심 탑 앞에서 우리 일행 기념촬영도 한다.

  

 

1박 2일 옛 직장동료들과 만나 충주에서 문화재 탐방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옛 생각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시간여행이었다. 다음 여행은 내년 5월에 당일치기로 강화도 여행을 떠나기로 하였다. 그 날이 또 기다려진다.